전국칠웅의 영토와 인구(한서 지리지 기준), 그리고 오기의 대전략
秦이 楚의 언영을 먹었고, 趙의 태원을 아직 먹지 못했으며, 상당군이 韓의 영토로 있는 것으로 보아 장평대전 이전의 상황으로 보임.
영토로만 보면 秦이 압도적임
헌데 인구를 기준으로 보면 상황이 달라짐. 코딱지 만한 땅을 가지고 있는 魏와 韓은 비록 영토의 크기는 작지만 그 땅은 천하에서 가장 인구가 많던 땅. 반면 燕은 땅은 커 보이나 실질적으로 사람은 거의 없던 똥땅.
물론 한서 지리지의 호구수는 기원후 2년이 기준이기 때문에 전국시대 때 인구 분포가 이와 똑같았을 것이라 보기는 힘듬.
우선 趙의 하북 땅은 춘추시대 말엽 晉 귀족들이 이민족 두드려 잡으면서 편입된 땅이라 전한 말기처럼 개발되진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
위, 한의 땅은 춘추시대 주요 제후국들이 존재하던 땅으로 예전부터 개발되어 있던 땅이긴 하나 대신 전란이 잦아서 200년 가량의 안정기를 거친 후인 전한 말기만큼 인구가 거주하진 않았을 수 있음.
반면 秦의 영역 중 관중은 전한의 수도권으로 고제, 무제 등이 지속적으로 산동에서 백성들을 데려와서 정착시키던 곳이었기 때문에 역시 전국시대에는 인구가 더 적었을 수 있음.
하지만 대략적으로 보았을 때, 진나라는 결코 압도적이지 못했음.
이걸 보면 위 무후, 위 혜왕(양 혜왕)이 왜 관중의 진나라를 먼저 털어야 한다는 오기의 말을 듣지 않고 동쪽으로 진출했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됨. 지금 당장 얻을 수 있는 인구, 물자가 많은 곳은 서쪽보다는 동쪽이기 때문.
2번째 지도에서 위나라의 땅 중 梁, 陳, 汝南 영역에 해당되는 땅은 위문후 시절 때는 초나라 땅이었고 그 이후에 전쟁으로 얻은 땅인데, 하동, 풍익의 인구보다 조옷만한 중원 땅이 훨씬 부유했음.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오기의 선구안이 뛰어났고, 위 문후 역시 인재의 말을 들을 줄 알던 명군이었다는 말임. 秦이 중원을 병탄하기 위해 반드시 먹어야 하는 땅은 춘추시대 때는 晉, 전국시대 때는 魏의 땅이었음.
주황색 막대기가 함곡관, 노란색 막대기가 이궐(이궐관)
옹=춘추시대~전국시대 초기 진나라의 수도
약양=진 헌공 대에 동진 정책을 펼치며 천도한 곳, 초한전쟁 때 유방이 수도로 정한 곳임
함양=진 효공 대에 천도한 곳
음진(陰晉)=기원전 389년 오기가 진나라 대군의 침공을 격파한 곳, 진이 점령한 이후 영진(寧秦)으로 개명했고, 유방이 화산의 음(북쪽)에 있다고 하여 화음으로 개명함
안읍=전국시대 초기 위나라의 수도
의양=기원전 307년 감무가 점령, 관중에서 낙양으로 들어가기 위한 길목
이궐=의양에서 낙양으로 들어가는 길목, 기원전 293년 백기가 이곳에서 한, 위 연합군을 대파
관중에서 중원으로 나오기 위한 길, 즉 황하를 따라서 내려오는 좁은 길은 위나라가 장악 중이었음. 진나라는 확장을 위해 가장 먼저 조져야 하는 나라가 바로 위나라였다는 말.
이걸 알았던 오기는
魏와 秦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 먼저 관중을 먹어야 한다. 위나라는 사람은 많으나 땅은 없고, 진나라는 사람은 없지만 땅은 많으니 진나라 땅을 먹고 남아도는 위나라의 사람을 그곳에 이주시켜서 농사짓게 해야 한다. 이렇게만 하면 위나라가 천하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주장한 것. 당장은 투자 대비 성과가 미미할 수 있어도 장기적으로 보면 후방 안정화+국력 상승 두 가지를 모두 이룰 수 있는 전략이라 볼 수 있음.
하지만 그 이주시킬 사람들은 과연 어디서 나올까? 당연히 기득권 영향력 밑에 있는 사람들이고, 이 기득권들은 지금 당장 본인의 세력을 키우기 편한, 더 부유한 동쪽 땅을 공격하길 원했음.
결국 위 무후 대에 오기는 실각하게 되고, 서하 땅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초나라로 떠나게 됨.
오기를 쫓아낸 위나라는 처음에는 잘 나가나 싶더만, 위문후 대의 전략, 즉 三晉(조, 위, 한)이 연합해서 齊와 楚를 막고, 그동안 위나라는 秦나라를 조오진다, 를 버리고 사방팔방으로 전쟁하면서 어그로 끌더니 결국 양혜왕 대에 동쪽으로는 마릉에서 제나라의 손빈에게, 서쪽으로는 서하에서 진나라의 상앙에게 두들겨 맞고 3류 국가로 전락함.